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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으로 읽는 세상만사
한국재난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전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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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어가 ‘빨리 빨리’라는 우스갯말이 있다.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한국 사람들이 ‘빨리 빨리’라는 말을 너무 많이 해 외국인들도 이 말을 따라 할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의 속도 경쟁은 전방위적이다. 신생아는 걸음마를 빨리 시작해야 하고 글자도 빨리 익혀야 한다. 학교에 진학하면 선행학습을 통해 남보다 빠르게 진도를 나가야 하고, 심지어 학교도 조기 졸업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 각종 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하는 것은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운전도 빠른 속도로 하고 걸음걸이조차 빨라진다. 한국에서는 모든 빠른 것은 선(善)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반면 오키나와에서는 윳쿠리(ゆっくり)를 더 선호한다. 윳쿠리는 천천히 또는 느리게라는 의미다. 아이가 학교에 갈 때면 어머니는 천천히 다녀오라고 한다. 식사를 할 때도 ‘천천히 드세요’라고 인사한다. 운전도 천천히 하는 것을 선호한다. 오키나와의 고속도로 속도제한은 시속 70Km다. 오키나와는 세계 최장수 지역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장수하는 비결을 묻자 어떤 사람은 오키나와에는 ‘오늘 할 일을 내일 하면 장수한다’는 속담이 있다고 했다. 서두를 일 없이 천천히 하는 것이 선(善)인 셈이다.
‘빨리 빨리’는 결과 지향적이다. 행동과 삶의 목표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운전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운전해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도착하려고 한다. 대학은 졸업하는 것이 목표이고 시험은 합격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빠르게 졸업하고, 빠르게 합격하는 것을 선호한다. 심지어 여행을 할 때도 이곳저곳을 빠르게 돌아다닌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보다 얼마나 많은 도시를 가 보았는가를 자랑한다.
반면 ‘천천히’는 과정이 목적이다. 천천히 하는 것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거쳐야 하는 절차를 신중하게 따른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천천히 하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천천히 여행하면 경관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음식도 천천히 먹으면 음식의 맛을 더 깊게 즐길 수 있다.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필요한 절차를 세밀하게 따르면 그 과정에서 학습하고 느끼는 것이 많게 된다.
오키나와에서 보도블록을 까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땅을 다지는 일을 며칠에 걸려서 하고 다진 땅 위에 모래를 깔고 다지는 일을 다시 며칠에 걸려서 하고, 모래를 말린 뒤에 보도블록을 하나하나씩 정성 들여 깔고, 다시 보도블록을 다지고, 보도블록의 틈새에 고운 규사를 채워 넣는 일을 다시 천천히 한다. 보도블록 까는 일 자체는 매우 느렸지만 한번 깐 보도블록은 비가와도 흔들림 없이 견고함을 유지한다. 더 중요한 것은 보도블록을 까는 일을 한 사람이 건성으로 일을 했다는 지적을 받을 일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대통령 탄핵 심판에도 빨리 빨리의 원칙이 적용되는 듯하다. 야당은 결론을 빨리 내기 위해 탄핵소추의 핵심 내용이었던 내란죄를 삭제했다. 헌재도 심리의 일정을 빠르게 진행했고 피의자인 대통령의 방어권도 충분히 보장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회의 탄핵 소추 내용이 충분히 검토되고 심의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빨리 빨리’ 내린 결론은 그래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며, 그 결론이 부정당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거로 선출하는 지위다. 따라서 민주적 정당성이 그 어느 직책보다 크다. 대통령을 파면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직접 선거로 선출하였다는 민주적 정당성에 필적할만한 사유와 절차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는 빨리 빨리의 정신보다 윳쿠리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본:https://www.hj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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