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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人災)의 결정판, 이리역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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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대규모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의 부상자 그리고 7,9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폭발사고로 많은 희생자와 피해가 발생한 것은 폭발의 규모도 컸지만 열차역이 도심에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 사고는 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관행이 얼마나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사고 당시에도 폭발물 운송에는 지켜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폭발물을 실은 열차는 정차하지 않고 역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것이나 불의의 폭발을 막기 위하여 폭약과 뇌관은 분리하여 운송하여야 한다는 점, 그리고 폭발물 운송에는 총포화약류 취급 면허를 가진 정식 호송원을 배정하여야 한다는 점 등이 지켜야 하는 규정이었으나 이리역 폭발사고에서는 이런 규정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시의 규정만 준수하였어도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지만 인간의 방심과 부주의로 인해 발생해버린 것이다.

▲사진 출처_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이리역 폭발 사고 당시
사고 열차는 ㈜한국화약이 인천에서 광주로 운송하려는 화약류를 실은 열차였다.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 22톤을 비롯하여 화약의 원료가 되는 초산 암모니아 5톤, 뇌관 1톤 등 총 30톤의 폭발물이 실려 있었다. 이런 대규모 폭발물을 운송하였지만 ㈜한국화약에서는 정식 호송원 대신 총포화약류 취급 면허를 가지지 못한 무자격자를 호송원으로 배정하였다. 한편, 이리역은 호남선과 전라선 그리고 군산선이 교차하는 핵심 열차역이어서 화물선의 경우 중계지로도 이용되었다. 사고 열차도 이리역에 도착한 후 광주행 화물열차에 중계되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역무원들이 화물열차의 출발을 지연시키면서 급행료를 관행적으로 받고 있었다. 해당 열차의 호송원은 역무원에게 급행료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열차 출발은 계속 지연되었다. 호송원은 20시간 이상을 기다리면서 역무원에게 두 차례나 항의 하였지만 열차의 출발 지시는 떨어지지 않았고, 화가 난 호송원은 인근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열차 안으로 들어가 촛불을 켜 둔 채로 잠이 들고 말았다. 화약을 실은 화물열차 안에는 호송원이라고 하더라도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도 어긴 것이다.
호송원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화물열차 안에는 화재가 발생한 상태였다. 놀란 호송원은 침낭으로 불을 꺼보려고 하였지만 불길은 더 거세어졌다. 열차 안에는 소화기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불이 더 커지자 호송원은 ‘불이야’를 외치면서 화물열차를 빠져나와 도주해버렸고, 불을 발견한 검수원 7명이 모래와 자갈을 끼얹어 불을 끄려고 했으나 곧 화약이 폭발하고 말았다.
30톤의 화약류로 인한 폭발의 규모는 엄청났다. 화물열차 아래에는 직경 40m, 깊이 15m의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졌으며 반경 500m 이내의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기관차 본체는 700m정도 떨어진 민가로 날아갔으며 파편 일부는 이리역에서 7km정도 떨어진 춘포면까지 날아갔다. 이리역에 정차 중이던 기관차와 객차 117량이 파괴되었고, 선로도 1,650m 정도 파괴되어 열차 운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리역은 물론이고 인근에 있던 이리시청과 남성고등학교와 남성여중고의 건물도 파괴되어 학교를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출처_코레일 전북 본부 / 이리역 추모탑
이리역 폭발사고는 인재의 결정판이었다. 출발 당시부터 분리해서 운반해야 할 화약과 뇌관을 함께 운송하였다는 점, 폭발물을 실은 열차를 장시간 동안 역에 정차시켰다는 점, 무자격자를 호송원으로 배정하였다는 점, 열차 출발을 위해 급행료를 암암리에 받았다는 점, 화약을 실은 열차 내부에 촛불을 켰다는 점, 호송원이 음주 상태에서 화약을 실은 열차 내부에 들어가 잠을 잤다는 점 등은 어느 하나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도 해서는 안 되는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났고 이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한 순간의 부주의만 있어도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음에도 이리역 폭발사고는 무수히 많은 사고 유발 요인이 중첩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사고도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전조증상을 보였다. 화약과 뇌관을 함께 운송할 때 이미 폭발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으며, 급행료를 명분으로 화약을 실은 열차마저 장시간 열차역에 정차시킨 것은 사고가 일어날 경우 피해 규모가 커질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이런 관행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규정이 있었지만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리역 폭발사고는 전형적인 인재였으며, 안전을 지키기 위한 규정은 사소한 것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원본: https://www.hj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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