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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 15일에 발생한 남영호 침몰 사고는 한국에서 일어난 해상 사고 중 최대의 희생자를 남긴 사건(사망자 326명)으로 기록되고 있을 뿐 아니라 희생자 대부분이 제주도민으로서 제주도의 대표적인 비극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그 이후에 나타난 해상 사고가 대부분 남영호 침몰 사고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에서 남영호 침몰 사고에 대한 성찰 부족은 큰 아쉬움을 낳는다.

 

남영호는 1967년에 건조되고 1968년에 운항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사고 당시에는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신조 선박이었다. 남영호는 서귀포에서 출발하여 성산항을 경유하여 부산까지 왕복하는 운항 노선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공 노선이 열악하던 당시에는 제주도 승객과 감귤 등 제주도 농산물을 육지로 운송하는 핵심 교통수단이었다. 남영호는 승객정원 295명, 화물 적재정량 130톤으로 설계되었으며 362톤급의 대형 선박이었다.

 

 

당초 남영호는 12월 10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폭풍주의보로 4일이나 기다린 뒤 14일에야 서귀포항을 출항할 수 있었다. 출항 당시 승객과 선원 238명이 승선하였으며 화물은 적재정량을 넘어선 약 209톤을 싣고 있었다. 성산항에서는 다시 승객 98명을 더 승선시켰으며 4일간 출하가 지체된 감귤이 대량으로 선적되었다. 이미 화물창고가 꽉 차서 선적할 공간이 부족하자 갑판과 창고 지붕에도 화물이 적재되었다. 성산항을 출항할 당시 남영호에는 승객 및 선원 338명, 화물 약 500여 톤이 적재되어 심각한 과적 상태였다. 성산항을 떠난 남영호는 운항 5시간 25분 뒤 여수 상백도 인근에서 심한 바람과 파도에 선체가 기울여지면서 중심을 잃고 침몰하였다.

 

 

사고 이후 경찰과 검찰 그리고 국회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검찰은 사고의 원인을 과적으로 결론지었으며, 이틀에 걸친 국회의 조사에서는 당국의 감독 소홀과 과적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남영호 침몰 사고는 원인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하기엔 함의하는 바가 너무 큰 사고였다.

▲사진 출처_서귀포 향토 문화 백과

 

남영호 침몰 사고는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우선 당시에는 과적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에 대한 관리ㆍ감독도 없었다. 남영호 침몰 사고 이후 서해 페리호 사고나 세월호 사고에서도 정원 초과와 과적의 관행은 전혀 개선되지 않아 정원 초과와 과적이 사고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화물을 선박에 고정시키지 않은 것도 사고의 핵심 원인이 되었다. 남영호의 경우 화물창고가 가득 차자 감귤을 갑판과 화물창고 지붕에도 선적하였다. 파도와 바람으로 배가 한쪽으로 기울자 이 화물들이 같은 방향으로 쏟아지면서 배가 복원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전복되고 말았다. 화물이 이리저리 쏠리지 않도록 선박에 고정만 되어 있었어도 배가 쉽게 전복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영호 침몰 사고 이후에도 이 간단한 조치가 지켜지지 않았다. 그 결과 세월호 사고에서도 차량을 선박에 고정하지 않은 것이 복원력 상실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해상 사고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기상악화에도 불구하고 선박을 운항하는 것이다. 남영호는 4일간의 풍랑주의보 발효가 끝나는 즉시 운항을 개시하였다. 풍랑주의보가 발효 중이면 선박 운항이 불가능하지만 주의보가 해제되면 운항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주의보가 해제되었다고 바다가 즉시 잔잔해지는 것은 아니다. 주의보가 해제된 직후에도 파도는 여전히 평소보다 높아 안전 운항에 더 유념하여야 하지만 오히려 과적과 정원 초과의 유혹은 더 커진다. 풍랑주의보로 며칠간 운항이 중단되었다가 운항이 재개되면 운송해야 할 승객과 화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위험은 더 커지게 되지만 이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었다. 서해 페리호와 세월호 역시 기상악화에도 불구하고 운항을 강행하였다. 특히 서해 페리호는 풍랑주의보가 해제된 직후 승객들의 요구로 운항을 강행한 측면이 있다. 남영호 사건에 대한 성찰 부족으로 이런 대형 사고 이후에도 해상 안전과 관련한 아무런 학습도 일어나지 않았던 셈이다.

 

 

남영호 침몰 사고에는 사고 이후 구조 과정에서도 심각한 난맥상을 보였다. 남영호는 침몰 직전 5분간 비상주파수로 구조신호(SOS)를 수차례 발신하였으나 신호가 제대로 포착되지 못하였다. 일본 순시선이 일본 어선으로부터 사고 소식을 무전으로 전해 듣고 한국 해안경찰대에 연락하였으나 사고 후 11시간이 지나도록 연결이 되지 않아 해안경찰대는 사고 자체를 인지하지도 못하였다. 심지어 일본의 교도통신이 정오 뉴스로 사고 소식을 전하였지만 해안경찰대는 ‘연락 받은 바가 없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결국 해안경찰대는 사고 후 12시간이 지난 뒤에야 출동하여 3명의 생존자를 구조하였을 뿐이었다. 남영호 침몰사고로 338명의 승선자 중 생존자는 불과 12명이었으며 해안경찰대가 3명, 한국 어선이 1명, 일본 어선이 8명을 구조하였다.

 

 

남영호의 구조신호가 제대로 포착되지 못한 것은 장비의 낙후에도 원인이 있으나 해안경찰대의 직무 수행 능력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다. 당시에는 해안경찰대 근무를 좌천으로 여기고 사명감 없이 근무하는 풍토가 있었다. 해안경찰대는 남영호가 발신한 구조신호를 포착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일본 순시선이 보낸 무선 연락마저 접수하지 못하였고, 일본의 해상보안본부가 부산과 제주의 한국 해안경찰대에 무선 연락을 하였으나 이에 대해서도 응답이 없었다. 구조신호를 제대로 수신할 수 있는 장비와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면 신속한 구조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진_남영호 위령탑

 

남영호 침몰 사고는 안전불감증이 낳은 전형적인 인재였다. 정원을 초과하여 승객을 탑승시키고, 적재정량을 훨씬 초과한 화물을 싣고 출항하여도, 바다가 거친 상황에서 출항하여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남영호는 성산항을 출발할 당시에 이미 좌현으로 10도 정도 기울여진 상태였지만 누구도 운항 중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남영호 침몰 사고는 이미 출항 전에 사고의 전조증상이 무수히 나타났지만 어느 누구도 전조증상에 주목하지 않았고 결국 침몰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남영호 침몰 사고 이후 유가족에 대한 보상과 선장과 선주에 대한 사법 처리가 이루어졌다. 반면 해안경비대에서는 누구도 사법 처리를 받지 않았고, 내무부 장관과 교통부 장관이 사의를 표명하였지만 사표는 즉각 수리되지도 않았다. 이후 여객선운항관리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이전의 관행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였다. 남영호 침몰 사고라는 대형 사고에도 불구하고 이 사고에 대한 사회적ㆍ제도적 성찰이 부족하였고, 결국 이는 20년 뒤에 서해 페리호 침몰과 40년 뒤의 세월호 참사라는 구조적으로 동일한 사고가 일어나는 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원본:https://www.hj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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