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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생 시절 필자는 한 전통주 스타트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필자의 회사는 월별로 전통주 정기구독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맛있는 사과 와인을 엄선, 양조장과 계약을 했고 고객으로의 배송을 3일 앞둔 날, 1만 병의 술을 양조장으로부터 배송 받았다. 그런데 포장을 위해 배송 받은 상품을 열어보니 계약했던 술의 스펙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다른 사과 와인이 도착해 있었다. 양조장 측은 소통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기존 술은 충분한 재고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미 받은 술로 배송을 감행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사실 고객에게는 입을 닫고 원래 준비한 술이 이 술이었다는 듯 진행하는 것이 편한 상황이었다. 고객에게는 배송되는 술에 대해 최소한의 힌트만 전달하고, 배송 당일에 구성을 오픈하는 랜덤박스식의 서비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실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양조장과의 계약 과정에서 부족했던 프로세스를 공개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그리고 필자는 당시 SNS에 올라갈 사과문 작성을 맡았다.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사과문을 올렸는데, 웬걸.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폭발적이었다. 단순히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투명하고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브랜드 신뢰도는 급상승했다. 해당 일이 발생하고 5개월 뒤, 다시 한 번 사과문을 작성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을 때 결과는 2연타. 우리의 실수는 다시 한 번 고객에게 신뢰를 안겨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회사는 창업한지 2년을 막 맞이하고 있는 신생 스타트업이었기에 예기치 못한 일이 자주 발생했고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 모두 배워나가고 있던 과정이었다. 이어서 세 번째 이슈가 터지자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두 번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한 이력이 있었기에 사과문을 작성하면 이번 위기 역시 잘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작성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해당 사건이 사과문을 쓸 만큼의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계속 이와 같은 방식을 고수하다가는 정작 브랜드에 큰 위기가 생겼을 때 내놓는 사과문이 힘을 잃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잘못했다면 사과를 해야지’에 머물러 있었던 단순했던 생각을 넘어 한 브랜드가 내놓는 사과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였다.

몇 년 전,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했던 이 생각이 문득 대통령 탄핵 시위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떠올랐다. 사과문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던 생각이 촛불의 파급력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시민들이 밝힌 촛불 하나로 2014년, 이미 한 명의 대통령을 탄핵시켰으며, 2024년, 나머지 한 명의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이 통과됐다. 촛불은 10년 만에 두 명의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끌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위의 형태는 평화로웠고 시민의 의도 역시 정당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줬고, 향후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사람이 누가 되었건 시민의 저력을 감히 가볍게 여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촛불에 대한 경각심 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시민이 밝힌 촛불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지녔기에 민주주의를 밝히는 빛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로도 작용할 수 있다. 빛과 파괴의 힘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촛불이 자칫 통제력을 잃었다가는 정권을 마음대로 바꾸는 기제로 악용될 수도 있고 대통령은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도 있다. 비록 그 촛불의 의도가 정의로웠다 할지라도 말이다.

독재 정치에 신음하고 있는 남미 국가들의 사례를 살펴보자. 페루는 2016년부터 2020년에 이르는 5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다. 2016년 대선으로 취임한 대통령 쿠친스키는 그의 정당이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데 실패해 두 차례의 탄핵 시도를 겪은 끝에 하야했다. 그의 후임이었던 마르틴 비스카라는 2018년 12월부터 정치 제도의 원상복구와 부패 척결을 목적으로 개헌을 추진했으나 2020년, 부패 혐의를 받아 탄핵 당했다. 그 뒤를 이어 당시 의회 의장이었던 마누엘 메리노가 대통령직으로 추진됐는데, 그의 대통령직 인수가 정당하냐에 대한 논쟁 끝에 취임 5일 만에 전격 사임했다. 이에 세 명의 대통령이 5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탄핵과 사임을 거치며 페루는 정치적 혼란기를 경험했다. 2022년에는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이 취임 1년 만에 탄핵 당해 구금되기도 하는 등 페루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불평등은 심화되고 경제성장은 정체되고 있다. 남미 내에서는 수많은 시위운동과 대의정치의 위기가 얽히고설키는 과정 속에서 ‘피로한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했다고 한다.

모두가 촛불을 성공적인 민주주의라고 추켜세우고 있는 지금, 찬물을 끼얹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경계심을 세워야한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국 끝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될 사람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깨가 많이 무거울 것이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돋보이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국정 운영을 결단력이 있게 시행해가야 한다. 바라건대 촛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기능하되, 새로운 지도자를 태워버릴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며 촛불을 밝히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원본:https://www.hj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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