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재난
[문화인류학으로 읽는 세상만사] 벌초 단상(斷想)
한국재난뉴스
2023. 9. 22. 11:19
728x90
한국재난뉴스 객원칼럼니스트
전주대학교 교수
추석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조상의 산소에 난 풀을 제거한다. 이를 통상 벌초라고 한다. 그러나 벌초(伐草)는 단순히 풀을 벤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산소의 풀을 제거하는 일은 소분(掃墳)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명칭이야 어떻게 사용하든 큰 문제가 아니지만 조상의 산소를 돌보는 일은 이제 후손의 입장에서는 큰 숙제가 되고 있다.

유교 전통에서는 조상의 산소를 잘 정리하고 돌보는 일이 효의 실천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추석에는 성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성묘 전에 조상의 산소를 잘 정리해야 했다. 통상 추석 보름 전인 음력 8월 1일에 벌초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식되었으며 제주도에서는 음력 8월 1일을 ‘벌초 방학’이라고 하여 학교를 쉬기도 하였다.
산업화와 도시화 이전에는 친족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았다. 이때는 후손들이 다 함께 모여 벌초를 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후손들이 모여 선대 조상의 묘를 함께 벌초하는 것을 ‘문중 벌초’ 또는 ‘모둠 벌초’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로 후손들이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게 되면서 벌초하는 일이 쉽지 않게 되었다. 먼 길을 왕래해야 하는 것도 일이지만 후손들이 함께 모이지 못하니 참석하는 사람과 불참하는 사람 사이에 갈등도 생겨나게 되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벌초를 하면 사고가 나기도 한다. 말벌 집을 건드리거나 뱀에게 물려 곤혹을 치렀다는 이야기는 벌초할 때마다 듣는 이야기다. 익숙하지 않은 예초기를 사용하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이래저래 벌초는 번거로운 일이 되고 있다. 결국 후손이 직접 벌초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벌초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초기에는 마을 사람에게 부탁하였으나 마을 사람들이 고령화 되면서 이제는 전문 벌초 대행업체가 맡아서 하고 있다.
대행업체에 벌초를 맡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손에 맡겨 벌초를 하면 효를 다 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손이 직접 벌초를 하면 꼼꼼하게 하지만 대행업체의 경우 대충할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일을 대충하는 것을 두고 ‘처삼촌 벌초하듯 한다고 한다. 조카사위가 벌초를 해도 대충하고 마는데 친족관계가 아닌 사람이 하면 오죽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벌초의 어려움은 화장이 증가하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봉분을 만들지 않으면 벌초할 일도 없기 때문에 화장 후 납골당에 모시는 것이 여러 모로 편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기존에 있던 조상의 산소도 개장하여 화장하고 납골당에 모셔 아예 벌초할 일을 없애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앞으로 벌초는 점점 사라지는 문화가 될 것도 같다.
그러나 벌초는 후손들이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고향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경우에는 설과 추석에도 고향을 가지 않아 친족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경조사에서 만나도 아저씨나 조카 얼굴도 모르는 경우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부모가 돌아가셔도 친족들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벌초할 때다. 조부모 산소를 벌초하면 4촌들이 만나고 증조부모 산소를 벌초하면 6촌들까지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조상은 벌초를 통해 후손들이 만나고 화합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점점 벌초를 직접 하는 경우는 줄어들겠지만 벌초의 정신과 의미는 사라지지 않기를 기대한다.
원본:https://www.hj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