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2분경 강남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삼풍백화점은 서초동이라는 입지, 초호화 쇼핑몰 이미지, 단일 매장 기준으로 전국 2위의 매출액을 내는 그야말로 한국 최고의 백화점이었다. 이 사고로 무려 502명이 사망하였으며 실종자 6명, 부상자 937명이 발생하여 한국전쟁 이후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 붕괴사고는 한 해 전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겹치면서 서울시민에게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사진_무너진 삼풍백화점 / 국가기록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부실한 시공과 잦은 설계 및 용도 변경 그리고 경영진의 안전불감증이 낳은 인재(人災)의 결정판이었다. 당초 삼풍백화점은 인근에 있는 삼풍아파트의 4층짜리 부속 상가로 설계되었다. 부속 상가 건물이었기 때문에 기초나 기둥 등도 부속 상가에 적합하게 경량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시공 도중 이 건물은 백화점으로 용도변경이 이루어졌다. 부속 상가와 백화점은 입점하는 업체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건물에 주는 하중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러나 기초와 기둥 등은 기존 설계에도 미흡하게 시공되지 못하여 안전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 후 확인된 바로는 기둥이 32인치로 설계되었으나 23인치로 시공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준공을 앞두고 이 건물은 5층 건물로 다시 설계 변경되었다. 시공사인 우성건설은 ‘증축이 안전성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면서 증축에 반대하였다. 그러자 경영진은 우성건설과의 시공 계약을 파기하고 삼풍건설산업이라는 관계사에게 시공을 맡기고 5층으로 증축하였다.
삼풍백화점은 천정에 대들보를 설치하지 않고 기둥으로만 천정을 지탱하는 무량판 구조로 설계되었다. 무량판 구조는 천정의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 기둥과 천정이 만나는 지점에 패널을 하나 더 설치하여 천정의 철근과 기둥의 철근이 튼튼하게 연결되도록 해야 하지만 삼풍백화점에서는 이 보조패널이 없거나 있어도 기준이 미흡하게 시공되었다. 그 결과 위층의 하중이 기둥에 작용하면 기둥이 천정을 뚫고 올라가 천정이 아래로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삼풍백화점은 붕괴 과정에서 이 가능성이 그대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사진_무너진 삼풍백화점 / 국가기록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잦은 설계 변경이 사고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삼풍백화점은 무리한 증축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준공검사도 마치지 않고 가사용 승인 상태에서 개점하였다. 1994년 10월에는 지하 1층에 구조변경 공사를 하여 11월에 위법건축물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백화점 영업은 계속되었다. 1994년 1월에는 2층에 삼풍문고라는 서점이 입점 되었다. 서점은 책의 무게로 건물에 많은 하중 부담을 준다. 통상 일반 건물에 비해 서점이나 도서관은 2배의 하중을 견딜 수 있도록 기초 설계를 하여야 하지만 삼풍백화점은 기초 보강 없이 서점을 입점 시켜 건물에 하중 부담을 크게 늘렸다.
증축된 5층은 초기에는 하중 부담이 적은 롤러장으로 이용되었으나 명품백화점과 롤러장의 이미지가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5층을 식당가로 개조하였다. 식당가가 들어오면서 무거운 주방기구가 들어오고 또 좌식 손님들을 위해 바닥 보일러 공사가 추가되었다. 가장 약한 5층에 상당한 하중 부담을 주는 상가가 들어온 셈이다. 결정적으로 옥상에는 29톤에 이르는 냉방장치 3개가 설치되었다. 건물 전체에 냉방을 공급하기 위한 냉각탑이 옥상에 설치되었으며, 소음에 대한 민원으로 냉방탑을 이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이전 과정에 하중 부담을 줄이기 위해 크레인을 사용하여야 했지만 비용 절감을 위해 롤러 위에 냉각탑을 올려 끌면서 이동하는 우를 범하였다. 이 과정에서 옥상의 상판 균열이 가속화되었다.
붕괴가 일어나기 전에 삼풍백화점에도 예외 없이 전조현상이 나타났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날 밤 순찰을 하던 경비원이 5층 식당가의 바닥에 싱크홀이 발생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5층 바닥이 갈라지고 기둥이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붕괴 전조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영진은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붕괴 당일에도 백화점 영업을 하였다. 붕괴의 위험이 커지자 경영진은 옥상 냉각탑의 무게를 줄이고자 냉각수를 빼는 작업을 하여 건물 전체에 냉방장치 가동이 중단되었다. 이 때문에 백화점을 이용하던 손님들 중 상당수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백화점을 떠나 그나마 인명 피해가 줄었다. 희생자 502명 중 306명이 종업원이었던 것도 종업원들은 매장을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6월 29일 오후 5시 52분경 5층 천정이 붕괴되는 것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건물 전체가 아래로 붕괴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사고가 일어나자 소방관, 경찰, 공무원 등이 사고 현장으로 달려와 구조를 시작하였지만 당시에는 대형긴급사고에 대한 구조체계가 정비되어 있지 못하였다. 지휘체계가 없어 우왕좌왕 하였으며 구조방법에 대한 지식 부족과 장비의 부족으로 구조가 지연되었다. 잔해를 중장비로 파내어 쓰레기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희생자의 유해가 섞이는 일도 발생하였다. 나중에는 쓰레기를 버린 난지도에서 142구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사진_삼풍위령탑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성수대교 붕괴사고와 겹치면서 건물 안전에 대한 위기의식을 촉발하였다. 사고 이후 긴급구조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119중앙구조대가 서울과 부산 그리고 광주에 설치되었다. 또한 모든 건물에 대한 안전진단이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진단된 건물 중 1/7은 개축이 필요하며, 전체 건물의 80%는 크게 수리가 필요하고, 진단된 건물 중 불과 2%만 안전한 상태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건물에 대한 안전진단과 관리가 강화되어 이후에는 이런 대형 붕괴사고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당시에 만연하던 부실설계와 부실시공, 그리고 경영진의 안전불감증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건물의 안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빈번하게 설계 변경과 용도변경을 하였으며, 특히 붕괴의 전조증상이 명백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영업을 계속하여 직원과 고객이 대피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인명 피해를 키웠다. 이후 삼풍백화점 경영진과 뇌물을 받고 허가를 해준 서초구청 직원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으며, 손해배상금 지급 등으로 삼풍 그룹은 공중분해 되었다.